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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S T O R Y

To. October 18th

10월 18일에게 1


잊지 못할 기억은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은 삶의 파편이 되어 나를 이룬다. 그의 그림은 첫사랑의 기억,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담았다. 10월 17일 야심한 밤, 희미한 불빛만이 비추는 진혁의 작업실에는 그가 자리 잡은 1평 남짓한 공간을 제외하고는 여러 그림들이 빼곡히 쌓여있다. 바로 옆 바닥에는 정리하다가 포기한 듯, 널브러진 붓과 도구들만이 이때까지 진혁이 무엇을 했는지 설명해 준다. 그는 가만히 앉아있다가 천천히 손을 움직여 다시 작업에 열중한다. 그러다 문득 그림들 사이에 놓인 조그만 달력을 보게 되는데, 달력 속 10월의 어느 한 칸에만 유난히 갖가지 색으로 꾸며져 있다.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형편없이 그려진 별들에 가려진 숫자 18. 달력의 10월 18일을 보며, 아크릴 물감이 캔버스에 번져나가듯 그때의 그 기억이 진혁의 머릿속에 점점 번져나갔다.
진혁의 기억은 아주 어린 시절 아름답지만은 못한 기억에서부터 시작된다. 돈 걱정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저녁만 되면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가지고 살았다. 매일 술을 마시고 횡포와 폭언을 일삼는 가족들. 그리고 이어지는 형제간의 차별, 일방적인 구타로 인해 그에게 어린 시절이란 사랑과 보호 대신, 그저 고통을 참고 견뎌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원래 이런가 보다.’, 미약하게나마 잡고있던 감정의 끈을 진혁은 놓기 시작했다. 그들이때리든 욕을하든 그저 자신의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아두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 수는 점점 줄어들고 내성적이게 변해, 자신의 감정을 표출할 줄을 몰랐다. 내성적인 아이는 학교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늘 문제아로 찍혔다. 가족들에게 사랑과 애정을 받아보지 못해, 같은 또래 친구들에게 따뜻하고 친근하게 대하지 못했고 학교에선 거칠고 특이한 아이라고 낙인이 찍혀 친구에 이어 선생들의 미움까지 받게 되었다. 자신의 삶을 이루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어린 시절의 진혁. 그 미움마저 진혁은 마음 속에 담기 시작했다. 그런 진혁에게 조그만 소원이 하나 생겼다.
바로 ‘죽음’. 어린 그의 눈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아른거렸다. 그 어린 나이에 마음에 담아두기만 하고 표출하지 못하자 속이 메스꺼워지고 답답해져 그냥 하루빨리 죽는 게 소원이 되었다. 희망이란 다른 차원의 단어인 듯 생소하고 꿈이란 남의 입을 통해 들을 수밖에 없던 진혁은 현실이라도 외면하고 싶어 밤하늘을 보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아름답다...” 어느 날 진혁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자신의 의식하고는 무관하게 터져 나오듯 말을 뱉어냈다. 저 어둡고 아무 색도 섞일 수 없는 검은 도화지 속, 자기 자신이 어디 있는지 항상 밝게 빛나는 별들을 진혁은 신기해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진혁은 밤하늘이 아닌 별들을 찾게 되었다.
더위는 물러가고 살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10월의 어느 날 진혁은 오늘도 어김없이 별들을보며 위로를 받고 있었다. 그때 들려오는 달콤하고 순수한 웃음소리. 맞은편 건물에 새로운가족이 이사 왔다. 젊은 남자, 여자와 진혁의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로 구성된 네 명의조촐한 가족들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진혁의 귀를 간지럽혔다. 케이크를 보아 생일이었던거 같다. 그 여자아이는 웃는 모습이 귀엽고 예뻤으며 그때 그 순간 빛이 났던 거 같다. 맞은편에 그 여자아이를 보며 진혁은 조그맣게 속삭였다. “아름답다...” 그렇게 진혁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며 미소를 띄었다.

10월 18일에게 2

10월 18일, 차가운 새벽 공기를 뚫고 진혁은 용산의 한 미술관으로 들어간다. 미술관에는 진혁의 그림만이 전시되어 있을 뿐, 아무도 없어 공허함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한 달간 진행된 전시회인데도 마치 오늘 처음으로 오픈한 것처럼 진혁은 긴장하고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확인하기 바빴다. 전시회장을 세 번 정도 돌았을 때, 진혁은 한 그림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그림 속에 보이는 단란한 한 가정. 진혁의 가족들과는 상반되게 모두들 웃으며 화목해 보였다.
싱그럽고 희미한 미소를 띠며 진혁은 한동안 그 그림 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진혁의 기억 속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와 어린 진혁은 방 안에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해는 모습을 감추고 어둠이 밀려 들어올 때 진혁의 유일한 안식처는 그저 이렇게 그녀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거였다. 창틀을 넘어 한 폭의 그림같이 그의 방에선 그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서로 알뜰히 챙기는 그녀의 가족들 모습에 진혁은 별을 처음 본 것과 같이 신비함을 느꼈다.
‘다 나 같이 사는 게 아니구나...’ 그녀를 볼 때마다 이 세상에 나 홀로 있는 거처럼 외롭게느껴졌지만,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가 진혁의 시선이라도 느낀 건지 진혁의 방을 돌아봤다. 그렇게 진혁과 그녀는 0.3초 간 눈이 마주치게 됐고 진혁은 놀란 나머지 창문 밑으로 몸을 숨겼다. 심장은 쿵쾅거리고 이명 소리만이 귀를 가득 채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없는 침마저 꼴딱거리는 진혁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진혁은 헐떡 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들어 그녀를 보는 진혁. 그녀는 나와는 다른 세상인 듯 아무렇지 않게 가족들과 얘기하며 웃고 있었다. 그럼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난리 쳤던 자신의 모습이 창피하고 바보 같았지만 나쁘지는 않게 느껴졌다. 그때 진혁은 처음으로 느껴본 감정에 허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저 애와 친해지고, 어쩌면, 정말 만약에 어쩌면 저 애와 함께 웃을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끝이 없는 그녀 생각에 밤은 하염없이 길어졌다. 지금 성인이 되어 생각해 봐도 그녀를 더 일찍 만나게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며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다음날, 학교를 마친 진혁은 홀로 땅을 보며 걷고 있었다. 누구라도 마주칠까, 혹여나 가족들이라도 마주칠까 봐 진혁은 늘 땅을 보며 걸었다. 어깨는 움츠러들고 시선은 땅에 꽂혀 앞에 뭐가 있는 지 모르지만 진혁은 그게 편했다. 어째서인지, 죽도록 싫은 이 집 가는 길은 늘 짧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더 천천히, 천천히 걷다가, 집 앞 놀이터에서 애들이 뛰어 노는 소리에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올렸다. 놀이터에서는 수 많은 아이들이 소리치며 뛰어놀고 있었다. 저 아이들을 보며 진혁은 늘 ‘쟤들은 뭐가 저렇게 재밌는 걸까?’라며 생각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쟤들도 그 애처럼 행복하게 지내겠지...’라고, 그 나이에 할 수 없는 생각을 하며 눈길을 돌리자 낯익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그 애였다. 멀리서만 지켜보던 그녀의 모습을 10M도 안되는 거리를 두고 보게 되니 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나왔다. 역시나 그녀는 하얗고 귀여웠으며, 특히 웃는 모습은 따라 웃게 만드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넋 놓고 그녀를 보게 된 진혁. 그런데 갑자기 강아지 한 마리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누가봐도 귀엽고 작은 강아지였지만, 그 애는 무서워하며 난간에 올라가기도 하며 피하기 바빴다. 그 모습을 본 진혁은 어디서 불어온 의협심과 용기였는지 그 애 앞으로 다가갔다.

10월 18일에게 3

“아... 그게..”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는 진혁은 몇 명의 기자들과 전시장 스테프들 앞에 앉아있다. 기자들은 질문에 답을 하려는 진혁의 모습을 신중히 기대하며 받아 적을 준비를 끝마쳤다. 말을 더듬고 대답을 못하자, 기자가 다시 물었다. “이런 이벤트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누구를 위한 거죠?”. 솔직히 진혁은 이렇게 시선을 끌 줄은 몰랐다. 그래서인지 준비했던 말을 못하고 더 더듬거리며 보는 사람 속을 태웠다. 아마 처음 보는 사람 앞이라 긴장해서 더 그랬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옛날보다는 괜찮아졌어... 어렸을 때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앉혀놓고 과거를 회상하는 진혁이었다.
집 앞 놀이터, 어린 진혁은 고개를 숙이채 눈도 못 마주치며 그 애 앞에 뻘쭘하게 서있다. 강아지를 피해 의자에 올라간 그 애는 울먹거리는 눈 빛으로 진혁에게 도와주라고 작게 속삭였다. 진혁은 “무... 무.. 무서워..”라며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뭐? 무섭다고? 괜찮아?”, 되려 진혁을 걱정해주는 민희의 모습에 진혁의 더듬거림이 더 심해졌다. “무.. 무서워 하지 말라고.. 그냥.. 그냥 놀아달라고... 하는 거야..”라며 말을 끝마친 진혁은 눈 앞의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그런 모습을 본 그녀는 안심이라도 된 건지 조심스럽게 의자에서 내려왔다. “만.. 만져봐.”라고 진혁이 말했지만 그 애는 선뜻 움직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많은 사람이 진혁 자신을 보고 느꼈던 거처럼 지금 진혁이 그 애를 보고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진혁은 그애의 작고 하얀 손을 덥석 잡고는 강아지를 만지게 했다. 처음에는 움찔 거리며 힘을 줬었지만 부드라운 털을 만지는 순간 긴장이 풀려 자신의 손을 진혁에게 맡기게 했다. 그러고는 둘은 정신을 차렸는 지 빠르게 손을 내빼고 작은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진혁과
그 애의 첫 대면이었다.
진혁은 일명 강아지 사건 이후 그 애와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가끔 지나가다 보이면 그 애는 모른 척, 아는 척도 안하고 지나가버렸다. 내심 속상했지만 그렇다고 먼저 다가갈 진혁도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추워지는 겨울, 어느 날부터 창밖으로 보이던 그녀의 집에는 다른 사람들이 와서 살고 있었다. 터져 나오는 소리를 참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날 며칠을 지켜봤지만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진혁은 또다시 밤하늘의 별을 찾고 있었다. 그 애를 만나고 느꼈던 감정들이 그저 꿈만 같다고 생각한 진혁이었다. 새 학기가 열리고 벚꽃이 떨어질 때쯤, 또 다시 땅을 보고 학교 운동장을 지나가고 있을 때, 낯익은 모습의 여자아이를 지나쳤다. 고개를 살짝 들어올려 실루엣만 보였지만 진혁은 직감했다. ‘그 아이다.’ 우연찮게도 그 여자아이는 진혁의 동네로 다시 이사를 왔고 같은 학교로 그것도 같은 반으로 전학을 왔다. 그 애는 반에 들어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 내 이름은 이 민희고... 잘 부탁해.” 진혁은 그때 처음으로 그 애의 이름을 들었다. 학교에서 특이하다고 소문난 진혁의 옆자리는 항상 비어있었기에 민희의 자리는 자동으로 진혁의 옆자리가 되었다. 진혁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마음을 다잡고 오랜만에 본 그애에게 이렇게 말했다.

“1... 1년 동안 고생해.” 몇 년 만에 본 민희에게 건네는 첫마디가 겨우 고생해라는 말이었다. 지금의 진혁도 그때 자신이 왜 그랬는지 모르고 있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의 표시였는지, 정말로 고생시킬 선전포고였는지, 진혁의 말을 들은 민희는 이해할 수 없어 되물었다. 귀찮았는 지 갑자기 엎드려 자는 진혁. 민희는 그런 진혁을 보고 나직히 말했다. “그때 고마웠어.”

10월 18일에게 4

엎드렸던 진혁은 놀라며 일어나 물었다. “뭐... 뭐라고?” 그러자 민희는 “그때 강아지.. 고마웠다고”라며 누구나 따라 웃게 만드는 그 마법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 그 꿈이 지금까지 안 깨어난 건지 이 현실이 무감각해지는 진혁에게 “너 아직도 거기 살아?” 민희의 질문에 진혁은 같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 어...” 당황하듯말하는 진혁. “너 나 몰라? 왜 모른 척해?” 쏘아대듯 물어보는 민희의 질문에 진혁은 “아..그게...” 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우리 집 재건축한다 해서 잠시 시골내려갔다 온거야. 너 아직 거기 살지? 같이 가자. 왜 싫어?” 진혁은 민희의 말에 이때까지 오해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진혁은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였지만, 또래 여자 친구들을 진심으로 괴롭혔다. 그래서 진혁의 옆자리는 늘 비어있었고 진혁과 짝꿍이 된 애는 하루종일 울기도 했다. 그렇게 애들을 괴롭힌 이유는 전적으로 가족에게 있었다. 엄마와 형은 폭언과 폭력으로 진혁을 대하면서도 결국 마지막에는 “다~ 널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야.”라며 토닥거렸고 그런 모습이 진혁을 통해 보여지고 있었다. 그래서 또래 여자 친구들을 진심으로 괴롭히기도 하며 소중할수록 더 강도를 높여 괴롭혔다. 진혁은 그게 당연한 줄 알았지만, 다가오는 친구는 없었고 그렇게 홀로 지내게 된 것이었다. 표현이라고는 괴롭힘 밖에 없어 민희에게도 그랬지만, 민희는 또래 여자 아이들하고 달랐다. 그런 소문을 들은 민희는 오히려 진혁과 짝이되었을 때도 좋았다고 했다. 그럴수록 진혁의 장난과 괴롭힘은 심해졌지만, 그 사랑스런 마법같은 미소로 진혁을 보듬어 주었다. 전화번호도 주고 받으며 그렇게 진혁과 민희는 급속도로친해졌다.
“지.. 지금? 알았어... 나갈게.” 그 말을 하고는 전화기를 끊고 대충 잡히는 옷을 입고 가족들 몰래 집 앞 놀이터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밤이었지만 가로등이 있어 놀이터만은 환했다. 그네에 홀로 앉아있는 민희. 진혁은 걸어가 민희 옆 그네에 앉았다. “왜... 왜 불렀어?” 진혁의 질문에 “그냥 수다 떨 사람이 필요해서.”라고 민희가 답했다. 둘은 그렇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 진혁은 또 다시 민희를 괴롭히고 싶었지만 별을 바라보는 민희의 눈은 너무 아름다워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고마웠어.” 민희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때 강아지 만지게 해줬잖아. 그거 아니었으면 아직도 무서워했을걸? 이제 우리 집에 강아지도 키워.”, “그거 잘 됐네.” 진혁이 맞받아쳤다. 말은 차갑게 해도 진혁은 내심 기뻐서 뛰어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랬던 거야. 처음 너랑 짝이 됐을 때 애들이 많이 걱정했거든? 근데 난 좋았어. 너랑 친해지고 싶었거든.” 진혁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좋아하면 괴롭힌다.’ 지금 이 상황은 그러면 안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 접해본 느낌에 무감각해졌던 진혁의 여러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너가 괴롭혔을 때 재밌기도 했어,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안 좋아서 애들하고 별로 못 놀았거든..” 민희는 말을 흐렸다. 요동치는 감정을 부여잡고 민희를 쳐다보는 진혁.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나는 동질감이 그 애를 더 안쓰러워 보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진혁과 민희는 별들의 위로를 받으며 달빛에 기대어 시간을 보냈다.

10월 18일에게 5

다음날, 진혁은 처음으로 느낀 감정들을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게 무슨 마음일까?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건 확실히 동정심만은 아니었다. 그저 하루 종일 민희가 생각날 뿐이었다.
진혁이 학교에 다다랗을 때, 누군가 “진혁아!”라고 부르며 100M도 더 되는 거리를 단숨에 뛰어오고 있었다. 민희였다. 진혁은 그때 자신이 처음 느껴본 이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랑’, 15년 인생 처음으로 찾아온 첫사랑은 사춘기와 함께 진혁에게 다가왔다.
사춘기의 여름은 유난히 뜨거웠고 길었다. 진혁의 얼굴에는 여드름이 피었고, 마찬가지로 민희의 얼굴도 사춘기를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사춘기 때문인지, 찐득히 다가오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떨쳐낼 수 없었고 민희를 보고싶은 마음만 깊어져 갔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진혁의 마음 속에 불안감이 느껴졌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진혁은 그저 눈앞에 보이는 민희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마음이라도 들킬까 일부러 더 괴롭혔다. 멍청하게 다 받아주던 민희를 보며 진혁의 장난과 괴롭힘은 더 다양해졌다. 김민종의 ‘착한 사랑’이 대대적으로 히트치고 있을 봄, 고음 파트만 집요하게 부르며 민희를 귀찮게 했다. 집에 전화를 걸어 민희가 받는다면, 자동적으로 노래를 불렀고 민희는 웃으며 싱거운 화만 낼뿐이었다. 그렇게 집가는 내내 김민종에 빙의해서 콘서트장을 만드는 진혁을 보며 민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방송사고 난 가수처럼 노래는 끊겼고 숨 쉬는 것도 까먹고 민희만 바라보던 진혁이었다.
“그래서요? 어떻게 됐죠?” 미술관, 기자가 쏘아내듯 진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진혁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게... 부,, 불안감은 더 현.. 실이..”, “불안감이요?”
이제는 공격하듯이 묻는 기자였다. 갑자기 말을 하지 않고 빈허공만 바라보는 진혁이었다. 그러다 “저기요, 작가님?” 기자가 말하는 동시에 손을 들어 말을 끊는 진혁이었다.
모든게 흑백으로 보이는 세상, 진혁은 아무도 없는 교실을 뛰어다니며 미친 듯이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의 옆자리 민희 책상을 뒤져보다, 서랍에 있는 일기장 하나를 꺼낸다. 표지에는 이 민희라고 적혀있고 만화 속 공주들이 그려져있는 핑크색의 일기장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천천히 일기장을 펼쳐보는 진혁. 빼곡하고 나란히 그려진 줄들 사이에 ‘김 은호’라고만 적혀있다. “은호라...” 진혁은 짧은 탄식과 같이 그 이름을 내뱉었다. 은호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며, 여러 사람과 잘 어울리는 그야말로 ‘엄친아’인 진혁과 같은 반 남자애였다. 납득도 되지만 괘씸하기도 한 잡다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진혁의 코가 미친 듯이 간지러웠다. 만지기도 해보고 때리기도 해봤지만 간지러움은 떠나지 않았다. 결국 세상이 떠나갈 만큼 재채기를 하자 지금 이 세상이 캄캄해졌고 그렇게 진혁은 잠에서 깼다. 부스스 눈을 떠보니 민희가 휴지를 돌돌 말아 진혁의 코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진혁이 잠에서 깨자 민희는 휴지를 버리고 안 한 척 여유로운 척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원래 같았으면 김민종의 착한 사랑을 부르며 괴롭혔겠지만, 진혁은 한층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너... 으.. 은호.. 김 은호 좋아.. 하지?” 토끼 눈이 되는 걸로 보아 확실한 듯 보였다. 어떻게 알았냐는 민희의 질문에 진혁은 꿈 얘기를 해줬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은호에게 말하지 않는대가로 놀리고 괴롭히고 간식을 얻어먹었다. 하지만 그 뒤부터 민희를 괴롭히고 장난치는 일은 예전처럼 좋아해서 괴롭히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질투심에 유발한 행동이었다.

10월 18일에게 6

방문 밖으로 자신을 욕하는 소리가 진혁의 귓가에 들려온다. 가족들은 언제나 진혁의 뒷얘기를 했다. 하지만 진혁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나에겐 민희가 있으니까. 마음이 울적하거나 힘들 때는 밤마다 별을 찾지 않아도 되고 혼자서 참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민희를 불러내 가만히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가족 간의 불화도 자신에게 들려오는 불쾌한 소리도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다. 그날도 은호를 방패 삼아 민희와 집 앞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6살의 겨울밤 두 남녀는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너 고등학교는 어디로 갈 거야?” 민희가 대뜸 물었다. 추워서 빨게진 볼과 크고 맑은 두 눈이 너무 예뻐 진혁은 의식이 날아간 사람처럼 민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희는 약간 큰 목소리로 되묻자 그제야 진혁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oo 고등학교.. 갈 거 같아.. 그냥 공부는... 운동이라도 할까...”, “나는 oo 고등학교. 우리 이제 학교에서 못 보겠네?”. 그 말을 들은 진혁은 심란했다. 민희가 간다는 고등학교는 저기 강을 건너 한참을 더 가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우.. 우리 자주.. 자주 보자.” 진혁은 애써 침착하며 말하고는, 깊은 한숨과 동시에 하늘을 바라봤
다. 그때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이 조금씩 희미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눈을 보며 좋아하는 민희와는 달리 진혁은 여전히 하늘의 허공을 바라보며 깊은 고뇌에 빠져있었다.
주먹이 바람 가르는 소리와 숨이 차 짧게 뱉어내는 호흡 소리만이 들리고 바닥에는 땀이 비오듯 쏟아져 내렸다. 링 위에는 헤드기어만을 쓴 채 두 남자가 스파링 중이었고 날카롭게 찌르는 종소리에 두 남자는 코너에 돌아가 헤드기어를 벗는다. 상대적으로 덜 맞은 쪽이 진혁이었다. 관장이 다가와 진혁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호랑이 눈에 머리는 벗겨져 있는 이 관장은 민희 다음으로 진혁에게 진심으로 다가와 준 사람이다. 고등학교 진학한 후, 진혁은 민희로 인해 잊고 있었던 현실이 다가왔다. 가족들은 이제 진혁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고, 특이한 성격으로 민희 외에 친구를 제대로 사귀어본 적이 없었던 진혁은 혼자가 되어 민희를 만나기 전 빛바랜 별처럼 어두워져만 갔다. 자주 보자는 말이 무색하게도 서로 볼 시간은 없었고 전화 걸어 가끔 안부를 묻는 게 다였다. 저 방문 밖에 들리는 벌레 같은 소음들은 진혁을 더 외롭게 만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당연하게 넘겼을 저 소리들은 민희를 만나고 나서부터 더 가혹하고 잔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무감각해진 감정들이 민희로 인해 색을 지니게 되었고, 자기 자신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된 진혁은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들이 너무 끔찍하고 힘들게 느껴졌다. 결국에는 원망까지 이르게 돼 이런 생각까지 가진 진혁이었다.
차라리 민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민희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민희도 다른 친구들처럼 똑같이 대해줬더라면, 진혁을 둘러싸 현실을 막아주던 민희의 벽들이 한순간에 허물어져 모든 고통의 순간들이 진혁을 옥죄어 왔다. 한번 고기 맛을 본 짐승은 고기를 못 잊듯이, 친절과 사랑을 받아본 진혁은 다시 예전처럼 무감각해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왜 이런 현실 속에서 살아야 하는 지 화가 났으며 억울해져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없이 울기도 했다. 소심하고 땅만 보고 걷던 아이는 이제는 난폭하고 거친 아이가 되었다. 민희를 못 봐서 생긴 짜증과 분노, 그리고 이런 현실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억울함과 원망, 모든 감정이 뒤틀리고 꼬여 폭력적인 행동으로 표출하게 된 것이다. 집 안에서 느끼는 무시와 홀대는 진혁을 거칠게 만들었고 더더욱 진혁을 혼자로 만들었다. 학교와 외부적으로 사고만 치게 된 진혁은 학교 상담을 통해 자신의 취미인 복싱을 시작하기로 했고 그러다 지금의 이 관장을 만나게 되었다.

10월 18일에게 7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잡혔으며 손에는 감각이 없었다. 취미로 시작한 복싱은 이 관장을 만나 본격적으로 시작해 선수까지도 바라보게 되었다. 너무 힘들었다. 힘들면 쉬어도 되지만, 그러면 다시 민희가 생각나 일어나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민희를 잊기 위해서 복싱에 전념하다 보니 선수까지도 준비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시합 첫날 링 위, 상대방의 주먹이 정확하게 내 안면에 날아 들어왔다. 뇌가 흔들려 곧바로 쓰러졌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물집이 잡힌 발도, 무감각해진 손도, 이때까지 참고 견뎌 온 고통의 순간도 아닌 민희의 실루엣이었다. 웃
기게도 그 고통의 순간에도 민희가 생각난 진혁이었다. 이 얼마나 가혹한가, 잊고 싶어 그렇게 이 꽉 깨물고 참고 견뎌왔지만, 정작 링 위에서 포기하기 직전에도 민희가 생각나 진혁을 괴롭히던 참이었다. 짜증나고 분했다. 그렇게 또 그 순간 보이는 민희를 잊기 위해 일어났다.
어떻게든 일어나 끝까지 라운드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진혁에게는 떠오르는 루키로 괜찮은 별명까지 붙으며 관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고통으로 민희와의 추억을 덮을 때쯤, 억지로 참고 움직인 부작용인지 진혁의 몸이 고장나기 시작했다. 두통이 오면 눈이 흐려지고 허리 디스크에 목 근육으로 눌린 신경은 목 디스크처럼 담이와 평소에도 고개를 돌리려면 약간의 고통이 동반됐다. 그렇게 복싱을 그만뒀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민희의 추억들이 희미해져 다시 예전처럼 무감각한 감정을 상기시킬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럴 수 있을 줄만 알았다. 민희를 보기
전까지는...
진혁은 복싱 선수로 지낼 때 좋아하는 감정이 아닌 옛정과 궁금증 때문에 수소문해 민희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말 놀랐던 것이 민희는 학교에서 왕따로 전교생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춘기가 지나고 급격하게 예뻐진 탓이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잊어야 하고 계속 신경 쓰게 되면, 이 고통을 감내하는 내 모습이 너무 비참해 보였다. 하지만 도통 민희가 왕따 당한다는 그 생각에 집중을 못 해 이 관장에게도 욕을 듣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진혁은 학교에서 힘 좀 쓴다는 애들은 다 만나고 다녔다. 운 좋게도 자신의 체육관에 민희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있었고 그 학교에 일명 일진으로 불리는 학생과 대면하고는 단호하게 말을 전했다. ‘그 애를 따돌리는 건 상관없지만, 건들지는 말아라. 내 첫사랑이다.’ 그래도 그 일진의 성격에 반박이라도 해야지만, 복싱 선수로 불량 학생들에게 소문이 난 진혁의 한마디로 그 일진도 알겠다는 말로 가볍게 문제를 해결했다. 그 일 이후 잊으려고 노력한 그 고통으로 정말 민희와의 추억은 희미하고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진혁은 그저 단순한 궁금증으로 민희의 학교로 가 얼굴만 몰래 보고 다시 돌아올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이어폰을 꽂고 땅을 보며 저기 강을 이루는 다리를 건너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런 무모한 진혁의 행동을 보며 남들은 아직도 민희를 못 잊어서 저렇다고 생 각하겠지만 진혁은 오히려 다 잊어서 이렇게 행동한 것이었다. 그렇게 민희의 학교 정문 앞. 한두 명씩 학교 밖으로 학생이 나오고 있었다. 진혁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담장 넘어 몰래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때 학생들 사이에서 유독 빛이 나고 작고 여린 여학생 한 명이 눈 에 들어왔다. 민희였다. ‘그래, 자연스럽게 다가가서 인사 한번하고 돌아오자.’ 라고 생각하며 나서려는 순간. 건장하고 멋진 남학생 한 명과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는 활짝 웃는 민희였다. 그때 진혁은 애써 부정하고 있었던 자신의 마음속 진실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온몸은 움직이 지 못하고 얼은 채 속에서는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억지로 잠재우고 있었다. 이때까지 부정해온 진혁의 감정들은 무엇 하나 사실이 아니었다.

10월 18일에게 8

보고 싶었고, 만나고 싶었고, 항상 생각났고, 그리웠으며, 하물며 당장 전화해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그게 진혁의 진심이었다. 아무리 심한 고통으로 자신의 몸을 혹사 시켜도, 모두 잊었다고 내 머리를 세뇌하고 거짓말해도 진혁은 민희를 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잊었다고 내 마음을 속이고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자신을 돌보지 않았으니, 자신의 진심도 뭔지 몰랐을 터. 하지만 오랜만에 민희를 본 그 날, 그 순간 진혁의 시간은 멈췄고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 할 만큼 찌릿한 충격들이 온 몸을 마구 찔러대고 있었다.

‘나는 잊은 게 아니구나...’ 그렇게 뒤돌아 가는 진혁이었다.
괜히 봤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온종일 진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복싱으로 성격도 변한 탓인지 학교 학생들과 선생들도 진혁을 나쁘게만 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진혁에게 그 어떤 위로도 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민희를 잊기 위해 노력했던 그 순간들이 너무 후회스러웠고 무엇보다 그녀가 계속 생각났다. 이제 민희를 잊는 그 시간들이 고통이 아니라 민희를 생각한다는 그 자체가 고통이었다. 자기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고 삶의 이유를 여러번 되물었다. 진혁에게 인생을 선물해준 그녀는 이제 그를 고통의 지옥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 지옥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진혁은 이 곳을 무작정 떠나고 싶었다. 멀리 떠나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민희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바보 같은 자신의 모습이 너무 찌질하고 꼴보기 싫었고, 이 곳에 남아 있는다면 이 고통의 굴레가 영원히 반복될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진혁은 도피성 유학을 생각하게 되었다.
‘작품에 감정을 담다.’ 이 말은 진혁을 예술의 길로 유혹했다.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마음속에 꾹꾹 담아두기만 한 진혁은 이 문장이 마법 같았고 달콤한 꿀 같은 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가 마음의 통증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예술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진혁은 유학에 예술을 얹어 예술의 성지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민희를 잊는다는 일념 하에 그리고 더 멋진 사람이 돼서 그녀 앞에 당당히 나타나겠다는 모순된 생각을 하며,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난 프랑스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프랑스에서 먹는 술 맛은 한국의 술 맛과는 전혀 달랐다. 마시고 죽자가 아니라, 죽고 싶어 마시는 느낌이었다. 부푼 희망을 안고 프랑스에 도착한 진혁은 숙소에 짐을 풀고는 한동안 침대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예술을 하고는 싶었는데,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고 언어 소통도 안 돼서 누구에게 물어보지도 못했다. 정말 진혁은 민희를 잊는다는 목표와 예술을 한다는 집념 하에 그저 프랑스에 오게 된 것이다. 공부 머리가 없었던 탓에 진혁은 6개월 간 인사 밖에 하지 못했고 유럽인들의 특유의 개인주의 마인드로 진혁을 더더욱 고립시켰다. 거기다 날씨도 흐리고 늘 비구름이 떠있었으며 해를 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진혁은 집 안에서만 생활하다가 우울증에 걸리게 됐다. 우울증이 길어지며 있으나 마나한 가족들의 존재도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저 누군가 내 옆에서 떠들어주었으면 했다. 심란한 마음에 진혁은 또 다시 민희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진혁의 생활은 일 분, 일 초라도 아까운 듯이 머리 속에 민희 만을 그려댔다. 그저 보고 싶고 목소리라도 들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진혁은 술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나가려고 노력해 봐도, 이불을 둘러싸 홀로 눈물을 훔쳐봐도, 프랑스에서 제일 유명한 음식을 먹어봐도 하루의 끝은 늘 술이었다.

10월 18일에게 9

야심한 밤, 진혁은 눈물을 안주삼아 온종일 술만 먹고 있었다. 술은 복싱으로 부상당한 곳들을 아려오게 만들었고 그 고통들은 그때의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겨냥한 분노와 짜증, 후회로 종결됐다. 그때 민희에게 먼저 다가갔더라면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사실 진혁은 프랑스로 오기 전 민희를 만났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진혁과는 달리 민희는 어제라도 본 친구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웃으며 떠들어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찌질하고 멍청한 자신에 대한 분노가 민희에게로 표출되고 있었다. 괜히 툴툴대고 굳이 아픈 곳을 끄집어내서 말하기도 했다. 그냥 저 환한 민희의 웃음을 자기 자신처럼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렇게 못된 마음으로 민희와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보고 싶었다.’라는 말도 건네지 못하고 돌아섰다.
프랑스로 올 때의 그 다짐은 잊은 지 오래고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술에 기대는 방법 밖에 없었다. 숙소 앞 조그만 마트에서 물어물어 술 구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자주 가다보니 이젠 익숙해져 마트 주인도 알아보고 반가워 할 정도였다. 밥도 거르고 술만 먹던 진혁은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술 이외에는 먹은 게 없어 술만 그대로 나왔지만, 진혁은 아랑곳하지 않고또 다시 술을 들이켰다. 3일 정도 이 짓을 반복하다보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이게 물인지 술인지 인지조차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그냥 마셔댔다. 그렇게 지낸지 3일 째 되던 날 진혁의 머릿속에 한 편의 그림 같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취해서 사리분별도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그림 같은 장면만은 또렷이 보였다. 이게 뭘 의미하는 지 진혁은 알 수 없었지만, 기록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 장면들을 직접 그려나갔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아침에 잠이 깬 진혁은 그 어느 날보다 개운했다. 도통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는 진혁이었다. 그러다 자신의 발에 무언가 걸려 보게 되었는데, 그건 어제 진혁이 기록하고자 그려나갔던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본 순간 진혁의 마음 한구석에 쌓여 있는 응어리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무의식 속에 그려나간 그 작품에 자신의 감정을 담았던 것이다. 진혁은 번개 맞은 사람처럼 짜릿한 감각들이 온 몸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숨은 가빠르게 빨라졌고 정신은 또렷해졌으며 술로 인해 손이 떨리는 증상까지 멈추게 되었다. 그 한순간 자신의 그림 작품을 보게 된 그 순간, 진혁은 다시 태어났다.
미술관의 기자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혁은 그런 반응들이 익숙했다. 이런 영화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 진혁 자신도 헛웃음을 짓기도 했다. 여유롭게 커피가 든 잔을 들고 음미하듯 마시고는 다시 내려놓는 진혁. 그중 한 기자가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림을 배우지 않고 시작한 겁니까?”, 그 질문을 듣고 진혁은 한동안 생각에 빠졌다.
생각해보니, 무엇하나 배우지 않고 그저 느끼는 대로 그려나갔었는데, 자신이 그때 어떻게 그랬을까 라며 그저 하나의 우연의 일치로만 치부하기도 했었다. 아니면 믿지도 않는 신이 너무 가여워 진혁에게 기회라도 준 건지, 그때 하도 술만 먹어 뇌가 미쳐 환상을 보게 된 건지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건 지금 이 미술관에 진혁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기 위해 많은 기자들이 진혁을 둘러싸고 있다. 진혁은 질문한 그 기자를 보며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이젠 그 일이 있고난 후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하려는 참이었다.

10월 18일에게 10

어느 학교 게시판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 있다. 그 무리에 진혁도 있었다. 그 종이는 시험 공지 정보였고, 이름을 확인한 뒤 시험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면 설렘과 기대로 가득찬 표정으로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진혁은 다른 학생과는 달리 쉽게 떠나지 못하고 종이에 적힌 자신의 이름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무엇이라도 다짐한 듯, 주먹을 꽉 쥐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진혁이 다시 태어난 순간 그 이후, 진혁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그림만 그려댔다. 그림을 그릴수록 자신의 마음이 한층 편해지는 걸 느꼈다. 무엇보다 그림 그리는 그 자체가 진혁에게 행복으로 돌아왔다. 처음 프랑스에 와서 술에 취한 거처럼 지금 진혁은 그림에 취한 것이다. 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목표와 계획이 생긴 진혁은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여러 학교를 방문해 면접을 봤다. 하지만 처음 보는 동양인이 그림 몇 점과 어눌하게 말하는 불어로는 학교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했고 계속되는 탈락에 이번 학교를 마지막으로 포기하려고 마음 먹은 참이었다.
교수 앞에서 잔뜩 긴장한 진혁은 과거 자기가 탈락한 다른 학교 면접 분위기와 똑같았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진혁은 씁쓸히 뒤돌아 걸어나갔다. 그때 한 교수가 뒤돌아가는 진혁을 멈춰세우고는 나긋하게 말을 걸었다. “너는 프랑스 어떤 대학도 들어 갈수가 없다. 너는 이미 너의 예술 세상이 있고 나쁘지 않다. 그러니 학교 말고 갤러리를 찾아봐라” 완벽하게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그런 말이라고 생각한 진혁은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는 조용히 분노를 잠재우며 그 면접실을 나왔다. 역시 결과는 탈락, 원래 계획에서 멀어지자 진혁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고민의 굴레가 끝없이 이어질 때, 그 교수가 자신에게 해줬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갤러리라...” 진혁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그 교수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결심이 서자 가까운 갤러리부터 파리 전역에 있는 갤러리를 찾아다녔다. 달달 외운 프랑스어로 자기소개를 씨디에 구워 그림과 같이 갤러리에 올려두는 방식이었다. 그 교수의 말과는 다르게 어느 곳에서도 연락은 없었고 50장 이상 구운 씨디가 몇 장 남지 않았을 때, 눈 앞에 구멍가게 같은 조그만 갤러리가 보였다. 진혁은 별 기대 없이 들어가 자신의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이때까지 흥미없이 바라보던 갤러리스트와는 달리 그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갤러리스트는 진혁의 작품들을 마음에 들어 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면접이 성사됐다. 그렇게 진혁은 운과 실력으로 정작 7개월 만에 그 갤러리의 후원 작가로 일하게 되었다.
젊은 갤러리스트는 장사 수완이라도 좋은 건지, 소문을 들은 여러 사람들이 진혁의 작품들을 보러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돈으로, 심적으로 진혁을 돕기 시작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프랑스에 처음 온 1년 4개월 만에 진혁은 프랑스 정식 작가로 등록 되었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으로선 진혁의 행보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지 알 것이다. 십 여년 동안 미술에 몸담은 사람들도 어렵다는 프랑스 정식 작가를 동양인이 그것도 쉽고 후한 조건으로 진혁은 등록했다. 한국에서는 불량 문제아 소리만 듣던 진혁은 만 19세의 나이로 동양인 최초 예술가가되어 예술 방송에서 인터뷰까지 하기도 했다. 물론 서툰 프랑스어 때문에 방송을 망치기도 했지만 진혁은 이 모든 순간이 신기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모든게 순조롭게 진행된 진혁의 행보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10월 18일에게 11

여러 각국의 화가들이 프랑스의 예술 세계에 이끌려 파리로 모여든다. 파리의 예술 세계, 예술인에 대한 대접, 쉽게 따라올 수 없는 교육들 등 예술인들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좋은 나라이다. 그렇게 프랑스 파리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유학생들이 모여있다. 그 중 대부분이 10여년을 미술에 종사하며 예술에 대한 뜻이 확고한 예술인들이다. 이런 베테랑들도 프랑스 작가가 되기 힘든 게 사실인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어린애가 프랑스 정식 작가가 되어 설쳐대고 있다. 그들의 눈에는 진혁이 그렇게 비췄다. 특히 유학생 중 한국인들이 진혁에게 심한 시기와 질투를 내비치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진혁에게 관심없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대뜸 갤러리를 소개해달라며 친한 척 다가오기도 했다. 이 사람들의 모순적이고 역겨운 행동들은 진혁에게 대인기피증을 안겨주었다.
뜻하지 않게 생긴 대인기피증은 6개월 간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만 머물게 만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혁은 자신에게 장애를 안겨준 한국인 유학생들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기본 10년을 한 우리도 되지 못했는데 저깟 놈이 뭔데.. 배우지도 못한 놈, 운만 좋은 놈, 실력도 없는 놈..’ 이 말들은 진혁의 가슴에 여러 상처를 내며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기댈 곳 없는 진혁은 자기 스스로 배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오랜 기간동안 예술을 해온 저 유학생들과 동등 그 이상의 배움이 있어야 미래에 여러 예술가들과 경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진혁은
자신의 예술 세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끝없이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리고 도구들을 펼쳐놓고 7~8일 동안 잠도 안자고 그림을 연구했다. 몇 시간을 걸쳐 그렸던 그림이라도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들면 갈아 엎기도 했다. 또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는 짐을 챙기고선 무료 관람이 가능한 미술관, 박물관으로 가 하루종일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진혁은 지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웠다. 미술관에서 본 다른 화가의 세계관을 이해하면서 집에 돌아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는 것은 그 어느 배움보다 값졌다. 자신을 무시하는 말도, 동양인 이라고 비참한 차별도, 힘들게 했던 과거의 기억도 지금 이 순간, 이 시간에 그림을 그리며 하나씩 떨쳐낼 수 있었다. 잠도 잊고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웠다. 차라리 그 돈으로 미술 도구를 구입하는 것이 더 값진 일이었다. 그나마 진혁을 버티게 만들어줬던 술과 담배는 집 거실을 나뒹굴고 있었다. 밤이 되면 쇼파에 걸터 앉아 오른손에는 담배, 왼손에는 술잔을 들고는 오로지 예술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들의 기분 나쁜 시기와 조롱은 곧 도화선이 되어 진혁을 더 발전하게 만들어줬다.
그런 자세가 습관이 되어 1년 동안 그림만 그려댔다. 그때 동안 그렸던 작품 수를 정확히 알수는 없었으나 얼핏 봤을 때 200점은 돼 보였다. 이젠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예술 세계를 당당히 말할 수 있었고 무슨 말을 들어도 주눅들지 않았다. 외관은 폐인이 되었지만, 진혁만의 예술성이 내재되어 있어 갤러리스트는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졌다. 그는 또 다시 진혁의 그림을 홍보하기 시작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진혁의 그림을 사려는 사람들도 몇 몇 생겨났다. 꽤 높은 값으로 사려는 소비자들이 있었지만, 자신의 그림을 한 번도 팔아보지 않았던 진혁은 겁이나 정중히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그때를 회상하면 내 자신이 너무 순수했다고 자책하기도 한다. 그렇게 점점 스타 화가가 되고 있을 때 갤러리스트는 더 큰 갤러리를 소개시켜주었고 진혁의 그림을 걸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어느새 진혁은 예술가로서 명성까지 얻게 되었다. 그때, 프랑스로 처음 왔을 때의 다짐이 떠올랐다.

10월 18일에게 12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 지 시계를 보던 진혁이었다. 한 기자가 진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전시 오픈 날에 관객을 받지 않는 거죠?” 그러자 진혁은 “이번 전시는 제 첫사랑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편지를 다른 사람이 먼저 본다면 싫겠죠? 아! 이제 시간이 되어서 이만... 못다한 질문은 전시회 끝나고 받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기자들은 수고했다며 하나, 둘씩 자기 짐들을 주섬주섬 챙기고는 전시장을 떠났다. 텅 빈 전시장, 진혁은 홀로 전시장을 돌며 마지막 확인을 하고 있었다. 11시 정각, 확인을 멈추고는 정시장을 오픈하고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의 진혁이었다.
과거 프랑스, 예술가로서 꽤 이룬 진혁은 그때 그 다짐이 떠올랐다. 내 인생을 바꿔준 그 이름 ‘민희’. 잊으려고 여기까지 왔건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그 이름. 예술가의 첫시작인 그녀에게 조그만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때마침 진혁은 한국 활동도 생각 중이었다. 그래서 그 곳 에서의 첫 활동 주제는 인생과 예술의 시작을 만들어준 민희라는 주제가 작가 진혁을 확실히 알릴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했다. 6개월 동안 작품에 열중했고 책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진혁의 생각대로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고 한국 미술관에서 전시 제안이 들어 왔다. 진혁은 그렇게 한국으로 가게 되었고, 10월 18일에 그녀가 사는 한국에서 그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내는 편지를 전시하기로 한다. 그리고 당일 아침, 기자 몇 몇이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했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알리 수 있는 기회라 인터뷰에 응하게 된 거였다.
혹시라도 오게 될 그녀를 위해 어떻게 말할지 생각을 끝내고 있던 진혁이었다. 하지만 해는 뉘엿뉘엿 지나가고 마감 한시간 전 쯤, 결국 그녀는 진혁의 과거 추억으로만 남기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때 고용한 전시장에서 희미하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진혁은 별 기대 없이 소리나는 곳을 바라봤다. 그녀 민희다. 진혁은 한눈에 알아보고는 벌떡 일어났고 민희도 진혁에게 점점 다가왔다. 손이 닿을 거리를 두고 민희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는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진혁아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반가움과 어색함이 섞여 점잖게 진혁이 대답했다.
“어.. 잘 지냈지. 넌?” 민희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는 말한다. “잘 지냈어.. 잘 봤어. 전시. 저... 진혁아, 안아줘도 돼?” 이번에는 진혁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는 괜히 헛웃음을 짓는다. 그런 진혁의 모습을 보고 민희는 조용히 다가와 그 누구보다 따뜻하게 안아준다. “고생했어.” 조그맣게 말하는 민희에게 “고마워, 배웅해줄게 나가자.”라며 말하는 진혁. 그와 그녀는 전시장을 나가는 그 길 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를 짧게나마 하고 있었다. 진혁과 민희는 건물 밖으로 나오고 6살 정도 돼 보이는 한 아이가 민희를 보고는 “엄마~!”라며 달려온다. 민희의 어릴 때와 꼭 닮아 보였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듬직하고 착해 보이는 남자가 보였고 그 남자는 진혁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진혁도 눈치것 인사를 받는다. 이들의 만남은 누구보다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는데 진혁이 분위기를 깨고 말을 꺼낸다. “안녕하세요. 민희의 어릴 적 친구 진혁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듬직한 남자는 상냥하게 답한다. “안녕하세요. 민희 남편되는 사람입니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기회 되시면 식사 한 번 하시죠.”
진혁 자신이 보아도 멋진 사람이었다. “좋습니다.” 웃으며 답하는 진혁, 그리고 이어서 민희가 말한다. “그럼 우리 이만 갈게. 꼭 보자.” 진혁은 민희와 민희의 딸에게도 인사를 건넨다. 딸은 부끄러운지 민희의 뒤에 숨어 손만 흔든다. 그렇게 떠나는 행복한 그녀의 가족들의 뒷모습을 보며 진혁은 가볍게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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